홍신자 - 자유를 위한 변명
20대 초반에 읽은 홍신자의 책 자유를 위한 변명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자유롭고 싶다는 열망이 강한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사실 그 때 책의 내용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읽으니 다시 새롭고, 더 와 닿는다. 나이가 들면 또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겠지.
사랑과 이별을 경험하고, 처음으로 학점 C+를 받아보고, 내가 하고싶어 하던 일의 인턴으로 일하는 요즘.
학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나의 역량의 부족함, 그리고 남들과 비교우위에 두는 자신감, 다른 사람과 좋은 말들로 인해 채우는 자유롭지 않은 나.
요즘 내가 꿈꾸는 위치에 계시는 분의 옆에서 서포트를 해주고 있지만 매주 수요일마다 나는 의기소침해지고 힘들어한다.
남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소장님은 나를 어떻게 볼까를 계속 신경쓰고 항상 부족해 보이는 나. 맞지 않은 옷을 입은듯이 즐기지도 못하는 나.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못해서 숨어버리고만 싶은 나. 좋은 기회이지만 그 기회를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소화도 못 시키고 있는 내가 보여서 힘들었다.
결국 자존감의 문제였다. 건강한 자존감이 아니였기 때문에 내가 힘들어했다.
열정이 나를 삼키지 않도록 마음 편하게 하자.
홍신자 - 자유를 위한 변명 中 p.76
노래 부르고자 하는가? 그러나 그대 자신이 노래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삶의 펄펄 끊는 에너지가 그대를 통해서 노래로 흘러나오게 하라.
춤추고자 하는가? 그러나 그대 자신이 춤춰서는 결코 안 된다. 삶의, 이 야생의 에너지가 그대를 통해서 춤으로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종교의 길이요, 구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춤은 무엇을 증명하거나 제시하기 위하여 추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보여 주겠다는 의지가 강해질수록 춤은 보이지 않고 춤추는 자의 몸만 보인다.
보이는 것은 춤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으니 나를 보아 주세요.' 하고 말하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춤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이 몸을 통하여 오는 신의 소리다. 나는 사라지고 신의 소리가 흐르는 것이다.
나는 나의 움직임을 지배하지 않는다. 신이 그 움직임을 지배하도록 나는 다만 그 신을 불러들일 뿐이다.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만이 남는다. 그러나 신을 불러들이기 위해선 먼저 죽여야 할 게 하나 있었다. 에고였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집은 너무나 좁아서 신과 에고, 둘이 한꺼번에 들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환영임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어차피 환영인 이 삶, 스스로가 영원한 큰 생명의 한 부분임을 깨닫기만 한다면 세상으로 나아가 무엇이 되어도 좋다고 하면서 근는 나의 영혼을 떠밀어 주었다.
홍신자 - 작가 인터뷰
(출처: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4452647&memberNo=3482895&vType=VERTICAL)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솔직하게 하는 거예요. 자기한테 가장 자연스러운 것, 불편함이 없는 거죠. 예를 들면 남이 원하는 대로 옷을 입으면 불편하잖아요. 그렇게 입거나 행동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가장 편하잖아요. 그런데 용기가 필요해요. 솔직하고 진실하면 그게 용기가 되죠.
사람들이 남을 너무 많이 의식하는 것 같은데, 그건 자기한테 솔직하지 못한 거예요. 자유롭고 싶으면 항상 자신한테 충실해야 해요. 그러려면 의식을 바깥으로 향하기보다 자기한테 집중해야죠. 사람들이 자유라고 하면 오해하는 게 많은데, 자유롭게 사는 걸 추구하지만 거기엔 책임이 있지. 자기 즐거움만 있고 정신없이 흐트러지는 게 아니거든. 그런데 그런 오해가 있으니까 '자유를 위한 변명'을 하게 되는 거지."
성별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그것을 원하는지가 중요해요. 그 의지가 삶을 결정하는 거니까.